포스트모던담론과 붉은자본
자  :
이호림
출판사  :
글도출판사
출간일  :
2024-04-22
가  :
8,500원

근대이후라는 담론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얼핏 생각되는 이상으로 훨씬 오래된 일이다. 일백여 년이 훨씬 넘는 시간 과정을 거쳐 온 것이니, 그렇다고 해야 옳다. 일세기나 더 된 이야기여서 새로운 게 결코 아니다.
근대이후담론이 형성되어 퍼지기 시작한 게 이렇게 일백여 년이 훨씬 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가 살고있는 시공간이 근대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다. 농담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요즈음 우리가 살고있는 시공간이 포스트모던 같은 모던 같고, 모던 같은 포스트모던 같은 느낌이 든다.
근대이후담론을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서 살폈다. 첫째는, 맑스의 공산주의 이론, 둘째는, 신좌파의 성담론, 셋째는 뉴욕타임즈의 기자 프리드먼이 열심히 기술했던 세계화담론 그리고 마지막으로 슈밥이 이끄는 세계경제포럼이 제창하고 있는 제4차산업혁명을 필두로 하는 그레이트 리셋 담론, 이렇게 네 가지다.
이들 담론은 모두 포스트모던담론으로 분류되고, 그러한 한에서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공통점이나 차이점에 대한 내용은 책을 통해서 직접 확인하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포스트모던한 시공간 분위기에서는 당연히 죽음 같은 어두운 이야기가 유행하게 마련이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흔한 세속의 말로 하면 말세라 할 수 있을 텐데, 말세와 죽음의 환영은 서로가 서로의 증거다.
근대에 나타난 죽음의 제일 형태는 신성(神性)의 죽음이었다. 이걸 확인한 사람이 니체였고 일백오십 년도 더 된 일이었다. 신성이 죽어버리니 신도 살 수 없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근대는 신성이 사라지고 신이 죽어버린 삭막한 시공간이 되었다.
그리고는 소설의 죽음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얼마 안 있어 사람들은 예술 전반이 죽었다고 했다. 소설뿐만 아니라 예술 전반에서 예술성이 상실되고 예술이 죽었다고 했다. 예술성이 사라진 것은 신성이 사라진 것과 무관하지 않다. 신성은 예술성이 의탁하는 근거 가운데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성은 죽었어도 아직 인간성은 남아 있는데, 예술의 죽음을 논한다는 것은 성급하다는 느낌이다. 그러나 그 성급하다는 느낌은 곧 사라졌다.
그러나 죽음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죽음의 행렬의 그 최종형태는 아직 오지 않았다.
어쩌면 오늘 밤 자고 일어나면 여러분은 근대의 죽음의 그 최종형태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될는지도 모른다. 그건 이미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이야기이니까.
이제 근대는 종언을 고하게 될 거라고 본다. 근대를 대신해 근대이후가 이제 우리 앞의 현실로 도래하게 되리라고 본다. 그게 어떤 형태를 띠었든. 머지않은 장래에. 근대의 황혼은 이미 오래되었다.
이 책이 나오게 되는, 나올 수밖에 없게 된 동기다. 근대가 죽고 근대이후가 도래한다고 하는 것은 지구상의 누구에게나 심각한 문제요 사건이다. 목숨이 왔다갔다할 일이니까. 이에 대해서는 누구나가 핵심 이해당사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이 책도 근대이후에 영향을 미치려고 한다. 자신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일에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주석을 달고 사실을 확인하는 절차를 거쳤지만, 이 글은 기본적으로 소설이다. 소설 가운데서도 모험소설에 해당한다.
필자는 이 글을 쓰는 삼 년여의 기간을 실제로 모험이었다고 규정했다. ‘작가의 서’에서 그렇게 쓰고 있다. 이 모험소설이 다루고 있는 대상이 영어로 adventure(모험)가 아니고는 접근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모험이 아니고서는 접근할 수 없는 대상, 존재란 무엇일까. 인간에게 있어서…
악마(devil)이다.
이 글이 모험소설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각주와 논증과 수많은 인용이 붙어 지루하고 짜증난다 하더라도 참고 읽어나가다 보면 어디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짜릿한 위기감과 서스펜스를 경험하게 되리라고, 감히 호언한다.
많은 독자의 방문과 독서와 사랑을 바란다.

글도편집부